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 박종원 감독, (홍경인, 고정일 주)

Review/영화 이야기 2013. 6. 21. 18:09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1992)

Our Twisted Hero 
8.7
감독
박종원
출연
홍경인, 고정일, 최민식, 태민영, 이진선
정보
드라마 | 한국 | 119 분 | 1992-08-15
글쓴이 평점  


* 줄거리 *

서울에서 시골로 전학을 오게 된 한병태의 국민학교 시절 회상 이야기. 새로 전학온 학교에는 막강한 자신만의 철옹성을 구축한 독재자 급짱 '엄석대(홍경인)'가 있음을 마주하고, 그의 급짱(반장)이라는 권력남용과 뒤로 벌이는 여러가지 폭력과 비리들을 담임 선생님께 고발한다. 그러나 숨겨진 정보원에 의해 그 사실을 미리 알아내고 엄석대는 유유히 빠져나간다. 교묘한 엄석대의 함정에 하나 둘 빠진 한병태는, 결국 선생님께 거짓말장이, 문제아로 이미지가 전락하게 되고, 급기야 성적까지 떨어지며 점점 학교 내에서 입지를 잃어간다. 그 입지를 지키기 위해 그는 투쟁 대신 타협이라는 달콤한 유혹을 선택하고 권력의 맛을 보기 시작하는데..



* 감상 * 

필자가 10살일 때, 그러니까 ..에..음..1992년이구나. 그 당시에 사회에 큰 영향을 주었던 영화. 홍경인(엄석대 역)과 고정일(한병태 역), 그리고 최민식, 그외의 여러 명품 배우들이 열연을 해 주어 더욱 빛이났던 영화. 이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스쳐가듯 몇번 들었으나, 왜 한번도 볼 생각을 하지 못했었는지 후회스러웠다. 이 좋은 걸 지금 본게 무척이나 아쉽지만, 한편으론 그 당시에 내가 보았다면 공감하지 못했을 이야기이기도 하고, 지금 내 나이이기 때문에 들지도 모르는 여러가지 생각들을 곱씹으며, 나는 지금 즐거움과 아쉬움, 그리고 슬픔에 취해있다.




<무언의 압박을 보여주는 우리 '체육부장'(일명 행동대장)의 카리스마>

이 영화는 그 당시의 열악한 제작환경과 수준에 비추어 보았을 때, 상당히 완성도가 높고 개연성과 연출이 뛰어나다. 또한 홍경인과 고정일(한병태)의 연기는 꽤나 수준급이다. 그 주변 조연인 친구들의 사소한 표정변화는 복선을 암시하는듯한 미묘한 긴장감을 조성했고,그들의 열연은 마치 할리우드의 영화배우들 못지 않게 보는 나를 웃음짓게도, 슬프게도 만들었다. 









영화 가장 초반부에 주인공 '한병태'가 하는 독백, 

"잘나가던 서울의 명문 '국민학교'를 뒤로하고 시골 촌구석으로 내려오게 되었다"...를 들으며.  참 우리 인간이라는 동물은, 예나 지금이나, 무언가 '급'을 정해두고 편가르기하며 너잘났네 나잘났네 하기를 정말로 좋아하는 족속이구나. 명문 국민학교라니. 풉. 우스워 나도모르게 웃고 말았지만, 이것이 여전히 현실이라는 사실이 문득 서글펐다. 그의 독백은 정말 '독백'이 아닌, 우리 모두의 독백은 아닐까. '급'이 다른 자녀의 학군을 향해 철새처럼 이동하는 우리네 이야기 아닌가 말이다.

서울에서 시골로 전학온 전학생 한병태. 크고 잘나가는 서울의 명문학교에서 곧장 1등을 도맡아 해왔으며, 꽤나 이성적이고 자신감에 차 있는 아이. 그러나 그가 내려온 학교는 단순히 촌구석의 찌질한 학교로 치부할 수준이 아닌 그이상의 것을 그에게 경험시켜 준다. 한마디로 작은 세상, 그 자체였고, 그 세상을 마주하며 점점 굴복하고 비굴하게 변해가는 무기력한 그의 모습은 우리들의 누구나 한번쯤 해 보았던 우리의 옛 비겁한 선택들을 상기시켜준다.

그 내면의 변화를 바라보는 것은, 마치 한편의 스포츠를 관람하듯 손에 땀을 쥐게 한다. 특히나 저 어리숙하고 젖살가득한 녀석이 덩치크고 시꺼먼 엄석대를 무서워하지 않고 마주하는 모습에선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와 같은 희열과 긴장감을 자아냈다.




그 촌구석 학교 하나가 어쩜 어른들의 세상과 이렇게도 다를 바가 없는지. 단지 '급짱(학급반장)' 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시작되는 갖가지 권력 남용, 정치, 조작, 정경유착, 비리, 폭력, 범죄, 술수, 모략, 끝없는 거짓과 그 거짓을 감추기 위한 더 큰 거짓..그 어리고 순수한 녀석들의 발칙한 행동들이 만들어내는 여러가지 이야기들은 나로하여금 잠시도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들었다. 또한 그 안에서도 굴복하지 않고 저항하는 한병태의 심리변화를 보다보면, 내심 나처럼 그를 응원하는 사람이 생길지도 모른다. 아! 영화를 보는 내내 전 직장의 임부장이 어찌나 떠오르던지. 

틈만나면 골프만 쳐대는 사장위주로 돌아가는 가족같은 회사(필자는 '가'와 '족' 사이를 굉장히 떨어져서 읽는다), 그 주변에 달라붙어 콩꼬물만 받으면 나몰라라 쉬쉬해주는 기생충같은 이사들 부장들. 여직원들을 술자리에서 접대부처럼 끼고 노는 문화, 잘리지 않기 위해 눈치보는 여직원들. 일상적인 비리, 뒷담화로 가득한 쉬는시간, 거짓에 거짓 꼬리를 무는 영업사원들과 영업지원팀의 비리, 경리부만 따로 쓰는 법인카드,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다들 일하기 싫어 빈둥빈둥, 무책임한 작태들..등 등....... 토악질이 나 더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나역시 그곳을 바꾸지 못하고 빠져나왔다는 데에 일말의 죄책감을 느낀다. 쓰다보니, 나도 참 비겁한 '엄석대반의 학우'들과 다를바 없구나.





뭐, 그게 인간이니까 너무 많은 걸 기대하지마.. 하는 친구들의 충고를 들은적이 있다. 그래 나 역시, 모든 인간이 그렇게 살아가야 하는 것이고 바꿀 수 없는 현실이라면, 그냥 받아들이고 말겠어. 그런데, 그게 아니지 않은가. 우리는 그것이 옳지 않다고 배워왔으며, 실제로 이 진실과 자유라는 것이 얼마나 숭고한 가치이며, 그것을 위해 목숨을 바쳐 투쟁한 우리의 멋진 선조들이 많음을 우린 수없이 역사책을 통해 배우지 않았나. 왜! 우리는 그것을 위해 싸우지 않나. 왜 적당히 타협하고 왜 적당히로 끝나버리고 마는가.. 지금도 수많은 곳에서 '급짱'을 하며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엄석대'가 곳곳에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나부터라도 진실과 자유를 정말 소중히 생각하지 않으면 안되겠다 다짐하게 된다.

마지막 장례식 장면에서 나오는 대사, "엄석대 같은 녀석이 나와서 지금의 정치를 다 휘어잡아 줘야 할텐데" 하는 식의 독재주의 공산주의 찬양멘트따위를 듣노라니, 울화통이 터질 것 같았다. 그렇게 당해놓고도 그 녀석들은 여전히 한다는 소리가 똑같았다. 마치 일제강점기 때문에 경제가 발전했으니 잘된것이다 외치는 무뇌아들이 생각나면서 말이다.









<우리를 때리며 함께 아파하시던 스승님이 그립습니다.>

또한 인상깊었던 것은, 최민식(극중 선생님)이 어찌나 올곧으며 정의롭고 열정이 가득한 청년인지를 보며, 저러한 스승밑에서 자란 자들은 과연 어떠한 제자가 될 것인지 굉장히 궁금하기도, 부럽기도 했다. 고등학교 때 늘 꿀밤을 때리며 웃던, 그러나 막상 뒤에선 몰래 우리 어머니께 촌지를 요구하신 모 선생의 '매'와는 사뭇 다른 그 매. 그 매가 진심으로 그립다. 사람은 맞아야 한다 이런 몰상식한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은 자신을 스스로 다스리기 매우 힘이들기 때문에, 윗 사람이 아랫사람을 교훈과 훈계로 잘 양육하고, 아랫사람이 윗사람으로 하여금 '본'이 되도록 지켜보는 관계가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사실 이 영화는 4.19 혁명을 토대로 꾸며진 이야기이다. 또한 그 배경도 역시 그러하며, 원작자의 의도 또한 다분히 그럴 것이다. 허나, 우리의 삶에 있어 교과서적인 교훈들이 이 안에 참 많기에, 단지 정치적 수단으로써만 끝나지 않고 우리의 삶을 성찰하고 반성하게 하는 좋은 도구가 되었으면한다. 



나는, 주저않고 이 영화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아울러, 우리들 마음속에 있는 일그러진 영웅들을 바로 세워, 우리의 진정한 영웅은, 달라붙는 수트를 입은 몸짱 슈퍼맨이나 돈많은 재력가 아이언맨이나 배트맨이 아니라, 비뚤어지고 모순되어 이중성을 가진 엄석대가 아니라, 아무것도 없더라도 권력에 저항하고 '자유와 진실'을 위해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싸우는 수많은 용기있는 영혼을 가진 자들이 우리의 진정한 영웅임을 한번 더 되새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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