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First Corinthians

성경묵상/신약 2013. 4. 12. 09:26

※ 성경을 묵상한 내용을 올립니다. 다른 어떠한 코멘트도 환영합니다.

※ (04/11/2013) Chapter 1~11은 조만간 다시 수정하여 넣을 예정



Chapter 12. '성령'

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 예수를 주라 말하는 자는 모두 성령, 즉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인가?
12-27 : 지체됨. 우리 모두가 각양 다른 은사를 받은 지체라는 점. 그렇기에 어떠한 차별도, 비교할 필요도, 시기나 부러움도, 의미가 없음.
----- 그럼에도 부러워하는 것은, 우리가 '육'의 지배를 받기 때문인가? 모든 이가 같은 것을 갈구하는 것은 왜 처음부터 우리에게 주어진 것인가?
----- 은사 : 사도, 선지자, 교사, 능력, 병고치는 은사, 돕는것, 다스리는 것, 방언하는 것
----- 은사중에 방언,치유,예언 등과 같은 것은 현세에도 실재하는가? (필자는 '방언'이 없다 하는 교회에 출석중이다)


Chapter 13. 'Love'
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2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 
    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
   니라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사랑은 무엇인가? 
오래참기, 온유, 투기않음, 자랑않음, 교만않음, 무례히행치않음, 자기유익을 구치않음, 성내지 않음, 악한 것을 생각지 않음, 
나에게 없는 사랑을 내가 인위적 노력에 의해 만드는(생성 혹은 발동)것이 가능한가?



Chapter 14. 방언과 예언
방언보다는 예언을 중시하는 사도바울. '덕'을 세우기 위하여, 방언보다 예언이 좋다 한다.
14:34 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함과 같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14:35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임이라
----- 요즈음의 시대에 이 성경구절은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바꾸어 해석하는 것이 성경적이지 '않은' 것은 아닌가?


Chapter 15. '복음'
바울은 복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부활에 대해 이야기하며, 죽은자들의 부활은 있다. 없다면 그리스도의 부활 또한 없는 것이라고 역설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우린 여전히 죄 가운데 있고, 이 세상에서 우리의 믿음이 거짓이라면 가장 불쌍한 자라고 한다.
그 부활이 없다면, 이생이 끝이니 먹고 마시자 할 것이라 한다. 하지만 그들에게 속지 말라 한다. 
그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니, 깨어서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한다. 
부활할 당시의 몸, 어떠한 몸으로 오는가에 대하여, 첫 사람은 땅에서 난 흙에 속한 자이고, 둘째 사람은 하늘에 속한 자라 한다.

----- 결국, 죽음, 다시말해 '사망'에 대한 태도에서 오는 차이인 것 같다. 사망의 쏘는 것은 '죄'다. 즉 다시말해, 이생에서의 삶이 끝인 자에게는, 
내가 누릴 것들을 다 누리고, 내 만족과 내 유익을 위해서 사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왜? 어차피 의미가 없는 삶이기 때문에. 어차피 한번 사는 인생이니까.
한번 사는 인생, 뭐가 두렵고 뭐가 무서운가? 무엇이 그리도 겁이 나는가? 어느정도의 이기심은 인간에겐 당연한 것이다. 
애초에 유한하고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내 주변은 다 내편, 내가 챙기고, 내 아는 사람, 인맥은 잘되게 하고.. 다 좋다. 하지만 집단 이기주의, 가족 이기주의에 빠지기 십상이다. 내 주변 '은' 이 아니라, 내 주변 '부터' 시작하여 퍼져나가야 한다. 
그 안에서 고여있으면 안된다. 퍼트려야 한다. 공평하게 나누어 주기 위해선, 희생이 필요하다. 
어느 정도 섬김이 필요하다. 불필요하고 경제적으로 아무런 이득이 되지 않는 일들도 감수해야 한다. 누군가는.
우리나라의 많은 어른들은, 사회정서상, 문화상 이런 것들을 몸으로 알고 있다. '정'이 무엇인지, 인지상정이란 어떠한 것인지. 
'충, 효, 예, 의' 와 같은 것들 말이다.

<충, 효, 예, 의>
 : 나라에 무엇하여 충성하는가? 나라의 본질은 '하나'였다. 우리는 다 하나다. 갈수록 글로벌화가 심해지는 이 시대에, 민족주의와 집단이기주의는 지양해야 하고, 조금 더 섬기고 희생하는 정신이 '집단'적으로 존재하여, 한 마음으로 다른 나라들을 향한 사랑을 표현할 때 비로소 성장하는 나라가 될 수 있다. 나라에 충성함은 당연하나, 국가간의 분쟁과 갈등이 없고 평등과 공평함의 전제하에 이루어 질 때 비로소 '충'의 본질적 의미가 실현된다 하겠다.
(대표적 예로, 수많은 일제강점기 시대의 일본군은 그들의 조국에 충성했으나, 우리나라에게는 피눈물이 흐를 오욕과 설움의 역사를 안겨다 주었다. 그것이 진정한 '충'인가? 그릇된 나라의 방향을 묵과하는 것은 결단코 충이 아니다.)

 : 나를 낳아주고 길러주신 부모님께 효도하는 것. 하물며 동물도 한다. 이것은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그 본질은 무엇인가? 그들은 우리의 육의 부모일 뿐, 우리와 동등한 존재이다. 우리와 함께 그 날이 되면 같은 모습으로 형제와 자매가 될 우리의 '지체'이다. 
다르게 생각하면, 우리가 '부모'님께 하듯, 우리의 이웃들(지체)에게 한다면, 보다 더 성경적인 사랑을 나누어 줄 수 있지 않을까?

 : 예.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법도와 도리들, 도덕이나 인습적인 좋은 모습들. 
그러나 이 '예'는, 각 문화와 시대의 사람들의 가치관에 따라 달라진다. 요즈음은 갈수록 '원하는' 것을 권해주어야만 하는 사회가 되었기 때문에, 아무리 좋은 것이어도 그들이 '원하지' 않으면 주는 것이 오히려 강요나 짜증나는 행위가 되는 듯 하다. 대표적인 예로는 '담배피는 고등학생에게 훈계'를 한다거나, '전도'를 한다거나 하는 일이랄까.

 : [정의란 무엇인가] 라는 책이 몇주째 베스트 셀러가 될 만큼, 정의로운 사회구현에 대한 우리나라 국민의, 아니 전세계의 사람들의 관심은 남다르다. 영화의 수퍼히어로나 드라마의 신념있는 주인공들은 인기를 누린다.
그러나, 그들이 정말 원하는 것은 '정의'이지만, 그 정의 역시 그들이 원하는 '모양새'가 아니면 안된다.
한 예로, 칸트의 공리주의와 같이, 모든 인간에게 보장되어야 할 최소한의 기본권들을 위하여, 기득권자들에게 있는 자원을 공평하게 배분하여 가난한 자들에게 주는 것. 
그것이 비기득권자들은 '정의'라 이야기하지만, 기득권자들은 아니라 한다. 부당하다 한다. 자신들이 정당하게 벌어들인 수익에 대한 재산권이 있으며, 침해하지 말라 한다.
결국, 개개인이 자신들의 이익을 내려놓지 않으면 이 고리는 절대 끊기지 않는다. 

<고전 15: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 더욱 견고하고, 흔들리지 않으며, 항상 주의 일에 힘쓰는 자가 되라 하는 바울의 권면은, 
우리의 수고가 헛되지 않으며,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는 것에 한 발자국씩 더 다가가고 있음을 상기해준다. 

나는, 그의 권면에 따라, 내 자리에서의 삶과, 내 주변의 사람들에 대한 나의 태도를 돌아보아야 한다.
매일매일, 규칙적으로 말씀을 읽고 묵상하여 내 삶의 방향성과 견주어 점검해야 한다.
조금만 방향이 어긋나도, 매우 극단적 방향으로 치닫을 수 있다.
거울과 같이, 내 매무새를 만지듯, 매일 매일 점검해야 한다..



Chapter 16. '복음'
마지막 장,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권면하는 모습 속에서 바울은, 
14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고 말한다.
그리고 문안하라~ 와 같이, 많은 '사랑으로 이미 행한 사람들'을 열거하며, 그들을 '알아주라'고도 하며, 축복하고 격려하면서 글을 마친다.
----- 사랑으로 모든 일을 행하는 것. 사랑으로 행하는 것이란 무엇일까.
단순히 사랑의 여러가지 의미
'필리아, 에로스, 아가페' 와 같은 의미들 중 대부분의 사랑은 '필리아' 또는 '에로스'에 그 의미가 전부인 것으로 일반화 되어있다. 그 중 '에로스'를 잘못 받아들일 경우, 부부에게만 허락한 아름다운 '성'을 그저 '사랑'하던 사람이니까 그당시의 성은 가능하다 로 합리화하는 '방종'을 초래하기도 하며, 심지어는 부끄러운줄 모르고 서로가 서로를 더불어 음욕이 불일듯 하는 것을 '사랑'이라 포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은 '에로스'보다 '아가페'와 같은 사랑, 다시말해 그리스도의 사랑의 모습을 의미한다. 서로를 향한 '지체의식'으로, 비교하고 깎아내리고 무너뜨리는 것이 아닌 '격려'와 '섬김', '용서'를 통한 그 사랑의 진정한 기능인 '세움'을 구현하는 데에 그 의의가 있다. 

그 사랑이라는 행위는 현대 우리 사회 속에서도 충분히 적용할 수 있다.
자존감이 낮고 외롭고 열등감속에서 스스로 죽어가던 사람을 
그 어떠한 기계도, 약도 고치기 힘이들고 어렵지만
오직 성경의 '사랑'과 '용서'와 '자비'와 '긍휼'과 '섬김'이 다시 살릴 수 있는 것처럼.
우리에게 마땅히 올바르고 하나님을 닮은 모습들(경건함)을 나타냄으로써, 비로소 사람이 회복되고, 올바르게 세워지고, 건강하게 자라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미 우리는 그렇게 design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도록. 하나님의 모습을 구하도록. 
하나님의 형상을 닮을 때 비로소 빛이 나도록.





사랑으로 행하자..
사랑이신 하나님을 닮아 거룩하게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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