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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06.27 자크엘륄의 한숨 - 홍순관
  2. 2013.05.17 성공지양주의를 지양

자크엘륄의 한숨 - 홍순관

딜레마 2013. 6. 27. 13:14

너무나 좋은 글이라 퍼왔습니다. 



자크엘룰의 한숨

좀처럼 팔리지 않는 내 노래를 바라보며 자크 엘룰의 한숨을 쉬어봅니다. 기독교를 바로 전한다면 아마 더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날지도 모른다는. 아 모두를 진리의 매력에 빠뜨릴 수 있다면.  -홍순관- 


기독교를 바로 전한다면 아마 더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날지 모른다며 자크 엘룰은 한숨을 쉬었습니다. 좀처럼 팔리지 않는 자신의 노래를 생각하며 가수 홍순관은 그 한숨을 떠올렸습니다. 그들의 한숨을 생각하며 아무것도 아닌 저같은 이도 그 한숨을 쉬게 됩니다. 그 한숨은 바른 기독교를 소망하는 모든 이들의 한숨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바른 기독교를 떠나는 것일까요? 홍순관님의 말대로 진리의 매력이 분명 있을진대 사람들은 왜 그것을 외면하고 등을 돌리는 것일까요? 

그 중심에 힘의 문제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 경쟁의 세상 속으로 던져집니다. 어떤 성(性)으로 태어나느냐, 어떤 부모를 만나게 되느냐, 어떤 국가에 태어나느냐, 그리고 어떤 시대에 태어나느냐에 따라 그의 운명이 달라집니다. 개인의 노력에 의해 극복할 수 있는 부분이 남아있긴 하지만 한계가 있습니다. 

주어진 모든 조건을 다 극복하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개인은 힘이라는 경쟁의 도구를 개발하고 사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개인이 노력해서 얻은 모든 결과는 자신이 행사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이 됩니다. 결국 세상에 태어난 모든 인간들은 힘을 추구하는 존재로 그 정체성이 형성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힘의 사용이란 정당한 것이며 불가피한 것이라는 가치관이 절대적인 것으로 개인의 중심에도 자리매김 하게 됩니다. 다른 이에게 뒤지는 부분이 있다면 열심히 노력해서 상대방을 따라잡고 나아가 그를 능가해야 합니다. 모든 문제의 해결은 힘을 강화하는데 집중됩니다. 

개인의 힘으로 부족하다면 다른 이와 연합을 해서라도 상대방보다 더 큰 힘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사회에서 일어나는 끊임없는 이합집산은 바로 이 힘을 강화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이루어지고 또 그 성패가 갈라집니다. 


사람들이 바른 기독교를 떠나는 이유는 이미 사회와 개인 모두에게 절대적인 도구이며 유일한 수단이기도한 이 힘을 버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힘을 포기한다는 것은 무방비 상태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두려운 일입니다. 더구나 힘이 있어도 세상은 항상 벅찬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무모한 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로또 복권(힘의 대명서로서의)을 습관적으로 사게 되는 것이 세상입니다. 어떻게 하든 힘을 소유하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하는 곳이 세상이라는 생각이 모두의 마음 깊이 새겨져 있습니다. 아무리 힘이 많아져도 불안의 요소는 남을 터인데 힘을 아예 포기하라는 기독교의 진리는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을 떠나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그것이 매력적으로 보일리 만무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바른 기독교는 사람들을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고 그것은 곧 약함과 무력(無力)으로의 초대라는 사실입니다. 다음 루터의 말은 약함과 무력의 이해에 도움을 줍니다. 

"악마는 강력하고 교묘하게 그리스도의 세계를 공격한다. 폭군과 이단자와 거짓된 형제를 앞세워 진실한 그리스도인을 괴롭히고 온 세상을 선동해 공격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소수의 순전하고 모욕당하는 사람들을 데리고 악마와 악마의 왕국에 맞서신다. 세상의 눈에는 헛되고 어리석은 저항처럼 보이지만 그리스도는 결국 승리를 거두신다. 그리스도가 제자들을 세상에 보냈을 때 제자들이 흔히 겪은 것은 한 마리 불쌍한 양이 백 마리의 늑대를 상대해야 하는 불공평한 전쟁, 상황이었다. 제자들은 하나씩 살해당하고 죽어 갔다. 

우리였다면 늑대와 싸우도록 사자를 보냈을 것이다. 여하튼 늑대보다 사납고 힘센 짐승을 보냈을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이렇게 잘못 생각하여 고통의 씨앗을 스스로 삼키고는 종들과 제자들을 학대하는 악마를 찾아간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우리의 미약하고 어리석은 생각과 행동에서도 그분의 한없이 고결한 지혜와 힘을 기꺼이 보여주신다. 오직 그리스도, 만군의 주만이 기적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늑대들 한 가운데서도 양을 지키며 직접 늑대들과 싸우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믿음이 인간의 지혜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힘에 있다는 것을 똑똑히 깨닫는다. 늑대들이 한 마리의 양을 삼키면 그리스도는 자신을 대신할 열 마리 이상의 양을 보내기 때문이다."  -마틴 루터- 

모두가 일등이 되기를 바라는 사회는 살벌한 전장터와 다름이 없습니다. 따라서 그 사회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기형적인 사회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거기에서는 남과의 대화나 공익 그리고 봉사 따위는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늘 약자의 희생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실상은 일 등이나 일 등에 근접한 사람들이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약자의 그 희생 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희생을 아예 하나님 나라의 기반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렇게 할 때만이 인류의 일치와 조화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사랑과 평화가 샘물처럼 흐르게 되는 새로운 사회, 약함이 존중받는 사회는 희생이 일상이 되는 곳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다른 이를 이기기 위한 힘이 아니라 자기를 죽이는 힘을 요구하셨습니다. 사실 그 힘(사랑)은 세상 어떤 힘보다 더욱 강한 초인적인 힘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고 하셨습니다.(요6:35) 그리고 당신의 살을 세상의 생명을 위해 내어주시고 사람들에게 그것을 먹으라고 하셨습니다.(요6:51) 

당신의 존재를 자기를 죽이는 힘, 자기를 무력화시키는 힘으로 이해하셨기 때문입니다. 떡은 내주어 나뉘어 먹히고 씹혀 자기를 없애기 위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찬을 행하고 거기에 참여하는 이유는 우리도 주님처럼 우리의 살을 남에게 생명의 떡으로 내어주는 삶을 살기 위함입니다. 양은 늑대에게 먹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살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생명의 떡이 되어 늑대를 변화시킵니다. 잡아먹히는 것이 아니라 내어주어 먹힘이 될 때 모두가 함께 살아나는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원수까지도 사랑하라 하신 이유는 원수도 함께 살리기 원하시는 아버지의 자비를 알기 때문입니다. 

성찬에 참여하며 그리스도처럼 되기를 원하며, 그리스도처럼 살기를 원하는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처럼 자신의 몸을 떡으로 내어놓는 사람입니다. 힘을 강화해 나가면서 자기를 보호하려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를 내어주기 위해 자기를 죽이는 힘을 구하는 사람입니다. 


과연 이 진리의 매력에 빠지려면 얼마나 어리석어져야 할까요? 기독교를 바로 전한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날 것이라는 자크 엘룰의 말은 정말 맞는 말입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 만족과 자기 위안을 위해 기독교에 몸 담고 있는지 모릅니다. 

더 많은 힘을 얻어 더 많이 누리고 더 많이 부리고 더 많이 인정받기 위해 얼마나 열심으로 신앙생활을 하는지 모릅니다. 그런 거짓되거나 함량미달의 자칭 그리스도인들이 용서하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고, 화해하지 못하고, 법정에까지 가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박이 터져라 싸우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바른 기독교를 아는 사람에게서 한숨이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런 한숨을 쉬는 사람 또한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 만군의 주만이 기적을 일으키신다는 것을, 한 마리 양이 삼켜지면 열 마리 양이 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약함이 존중받는 사회는 결코 허황된 꿈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고 다만 완성을 기다릴 뿐입니다. 그 사이에서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살을 남이 먹기 위한 떡으로 내어 놓아야 합니다. 약한 모습으로, 무력한 모습으로 말입니다. 

생명수 샘물을 값없이 마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기 때문에(계21:1-7참조)  그곳에 다다르면 분명 자크 엘룰의 한숨마저도 사라질 것입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그 길이 협착하"다고(마7:14) 하신 이유를 마음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글/최태선 오직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는 목사





너무나 깊이 공감이 가는 글이다. 또한, 그의 문체와 적절한 그리스도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가져다주는 통찰은 무기력해진 내 신앙생활을 돌아보게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예수님께서 너무나 많이도 언급 하셨던 그 희생과 섬김과 오래참음과 사랑과 용서와 자비와 충성과 온유와 절제와 양선과..... 뭐 말해 무엇하겠나 입만 아프지. 어차피 말이 아닌 삶으로 살라고 하셨던 것이 아니었나를 생각해 보며, 과연 그리스도인으로써의 조화롭고 균형잡힌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계속 고민하게 된다.

심지어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저마다 다른 인생철학을 가지고 그 '균형'의 정의를 내려, 이미 균형잡힌 삶을 살고있다고 자부하는 이들도 있을 수 있으며, 자신이 정의한 그것을 좇아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도 있을테지만, 나는 그 정의 자체에 대하여 계속하여 회의하고 있으니, 정체되고 오히려 뒤쳐진듯한 느낌이 드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시각 장애인으로써 일반 고등학교에 영어 강사까지 하고있는 한 내 후배는, 이렇게 말했다.

"내 평생 소원은 하늘을 하루라도 보는 것이에요. 나는 내가 지금부터 몇십년간 번 돈 몇십억으로도 현대의학으로 그 소원, 다시말해 눈을 뜨는 것을 이룰 수 없어요. 당신들은 그 몇십억짜리 눈을 지불하고 받았나요? 그것을 한 번이라도 몇십억 이상의 가치만큼 감사해 본 적 있나요? "

그녀에게 있어 종일 더럽고 추하며 불쾌하고 음란한 것들만 바라보며 사는 사람들의 그 '눈'의 사용에 대한 생각은 과연 어떠할까? 내 몫까지 열심히 써 주고 있어 감사하다고 할까? .. 어떤 이에게는 평생의 소원이 될 수 있는 그 것을, 어떤 이에게는 그 눈을 사용하여 엄청난 일을 할 수도 있는 것을, 어떤이들은 너무도 쉽게 낭비하는 이런 불공평함은, 우리가 아무리 떼쓰며 목놓아 울어도 바뀌지 않는 현실이다. 그리고 그 현실에 익숙해진 가진자들은 이내 그 가치를 망각한다.


나는 막 세상을 알아가기 시작할 이십대에, 우리 인생에 있어 '무엇'을 하는가가 중요하기 보다는, ''하는가가 중요한 것은 모든 이들이 알것만 같은데, 정작 현실에서는 '왜'보다 '무엇'에만 미친듯이 열광하고 또 열광 하라는 주장을 당당히 펼치는, '무엇'을 하는가로만 사람을 평가하는 기이한 현상을 목격하고 충격에 빠졌었다. 마찬가지로 인생을 쾌락과 즐거움만으로 채우기 위한 노력도 좋겠다만은, 그 행복 이면에 발생하는 여러가지 상황과 문제들을 무조건 외면하는 비뚤어진 시각과 이기적인 생각은 우리가 가장 주의해야 할 부분이 아닐까.. 그렇기에 우리는 삶의 전반적인 영역에 대한 균형잡힌 시각을 갖추어야 하지 않을까? 결론은, '행복' 이전에 내가 추구하는 그 '행복'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분명히 인지해야 하지 않나 하는걸로 내가 결론을 내렸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그보다 더 나아가, 근본적인 삶과 죽음에 대한 고민, 이 세상의 모든 현상들과 일어나는 일들, 역사들, 나아가 인간 본연에 대한 이해까지도 나아가야 한다. 허나 그러한 깊은 사고는 사라진 지 오래된 것만 같다. 여전히 그 '무엇'을 좇아 시간과 열정을 다 쏟아붓는 사람들을 바라볼 때면, 나는 어제 죽던 그가 그토록 바라던 그 '오늘'을 낭비하는 듯한 이들의 일종의 폭력과도 같은 '낭비'로만 느껴져, 마치 그녀(시각장애인 친구)가 느낄법한 안타까움에 몸서리가 쳐진다. 허나 그 또한 나의 시선일 뿐, 나를 그렇게 바라보는 제3자가 없으리란 보장이 있는가?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시선이다.

과연 하나님이 바라보시기에 나는 어떠할 것인가. 

나는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게 살아갈 수 있는가.

나는 또 다른 한숨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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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일에 약속이 없다는 것

그것이 문득 사람을 이렇게 비참하게 만드는구나 싶어

이불속에서 나오고 싶지 않았었으나 이내 "그게 뭐!! 뭐 어때서!" 하는 반항심과 함께 오늘아침 이불을 박차고 일어났다.

 

약속하나 없는 석탄일 아침

아침부터 '넘의 살'을 먹자는 엄마의 표현이 마냥 귀여워 한참을 웃고나서

함께 삼겹살을 구워먹고 느긋하게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떨다가 문득

'연애' 에 대한 많은 강사들의 화려한 입담이 참 재미지다는 이야기를 꺼내며 몇 동영상을 깔깔대며 보기 시작했다.

 

나에게는 인터넷이라는 놈이 처음에는 '지도'찾는 것으로 시작했다가, '사회'면과 '정치'면, 그리고 '연예'면까지를 다 보고나서 끝나버리는 것 처럼 정처없이 방황하는 일이 다반사인데, 내 정돈되지 않은 내면세계와 닮아있는 것 같아, 그 공간이 그런 줄 알면서도 매번 열고나서 한참을 보낸 후에 후회를 하고 닫는다.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연애'강의를 보다가 김미경 강사의 '부자스토리'라는 강의까지 보고 앉아있게 되었다. 그 스토리 중 한 대목을 보며 이런저런 생각이 나 끄적여본다.

 

 

한 집안과 다른 집안의, 100년 넘게 '차이'난다는 그녀의 한이 서린듯한 말. 

누구는 1980년대에 이미 '미국'유학을 다녀와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석좌교수를 하고, 누구는 '돼지'우리를 돌보며 근근히 살아가고 있다며 자신의 집안이 걸어온 길에 대한 후회와 반성, 그리고 자신은 절대 그렇게 살지 않겠다 다짐 또 다짐하는 그 모습, 그리고 실제로 악바리같이 살아온 그녀의 삶..

 

나는 여태 그 '차이' 라는 개념, 다시말해 그 '성공' 에 대한 많은 이들의 가치관을, 성경적인 사고로 생각한다는 전제 하에, 굉장히 세속적이고 무의미한 일이라고 생각해 왔었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성경적인 사고'라는 것에 대해 설명한다면, 우리는 많은 것을 '소유'하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은연중에 '비교'하며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는 인간들이기에, 충분히 '행복'하게끔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들(자연,환경,가족,건강,시간,양식,에너지 등등)을 감사하지 못하게 하는 '사탄'의 수단이며 계략이라는 것이다. 그 사탄의 수단이라는 것은 대한민국 땅에서 유난히 잘 먹혀들고 있는데, 예로 들자면 '좋은 학교'와 '좋은 직장', '좋은 차, 집, 옷, 좋은 배우자, 멋진 외모, 좋은 컴퓨터..' 등과 같은 우리들의 끝 없는 욕심과 욕망을 구체화 시키고 현실화 시켜낸 장난감들을 계속 만들어내 우리가 '감사'하지 않고 '불평'하며 살게하고 또한 진짜 '중요한' 것이 아닌 부가적인 것을 위해 우리의 시간과 물질과 노력을 다 쏟아붓도록 한다.. 라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무언가 필요해서 사는 것이 아니고, 빈곤해서 가난한 것이 아닌 상대적빈곤과 상대적 박탈감이 우리 인생을 좌지우지 하는 일이 다반사인 이 현실에 대한 해결책이랄까. 물론 해결책이 아닌 나만의 정신승리일 수도 있겠지.)

 

그렇기에, 남들이 바라보기엔 우리 집안이 100년 내내 곰국만 끓여오는 별볼일 없는, 변화나 어떠한 멋진 '성공'스토리가 없어도 '하나님 한분'만으로 만족해왔으며 '정직'과 '성실'이라는 큰 가치를 지켜왔다..라는 그런 이야기가 더 자랑스럽고, 더 큰 가치를 위해 희생하는 스토리라 생각했으며 나 또한 그렇게 살리라 마음먹었었다.

 

 

 

 

 

 

하지만!!!!! 문득, 오늘 오전 그런생각이 든다. 내가 문득 '성공'을 무조건적으로 '지양'해 왔던 것은 아닌가? 하는 질문과 함께, 그들(성공한 사람들)의 삶은, 내가 생각해 왔던 것 만큼 그렇게 치부할 수준의 것이 아니었다고. 그들은 정말 열심히 살았고, 그들의 삶에서 많은 것들을 희생하면서 까지 그 것을 위해 달려왔으며 굉장한 노력이 수반되어야 한다고.

그러한 생각이 들고나니, 끊임없는 질문들이 내게 덤벼들기 시작한다. 물론 그들의 '동기'는 나 역시 반박하고 싶다. '성공'지향, ''지향, 이것은 여전히 내가 따르고 싶지 않은 세속적 가치임엔 분명하다. 허나, 그들의 그 열정과 겸손함, 그리고 그 절제(self-control이라 NIV 성경에는 묘사되어 있듯)하는 극기의 정신은 무조건적 성공을 지양해 오며 '교만함'과 '오만함'에 빠져있던 내 모습보다 훨씬 더 멋지다는 것..그리고, 그 성공을 '지양'해 오던 나의 가치관도, 결국 그들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으며, 무의식적으로 어느정도는 그들의 가치를 좇으며 살고 있다는 것.

 

성공을 지향한다. 

하지만, 성공지양주의 는 지양한다. 

그들의 열정과 노력, 순수한 땀방울을 가벼이 여기지 말자.

내가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이 내 교만은 아닌지, 돌아보자.

나는 가장 낮은 자가 되어야 하고, 가장 밑에서 '섬김'을 해야하는 그리스도인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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