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처럼 팔리지 않는 내 노래를 바라보며 자크 엘룰의 한숨을 쉬어봅니다. 기독교를 바로 전한다면 아마 더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날지도 모른다는. 아 모두를 진리의 매력에 빠뜨릴 수 있다면. -홍순관-
기독교를 바로 전한다면 아마 더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날지 모른다며 자크 엘룰은 한숨을 쉬었습니다. 좀처럼 팔리지 않는 자신의 노래를 생각하며 가수 홍순관은 그 한숨을 떠올렸습니다. 그들의 한숨을 생각하며 아무것도 아닌 저같은 이도 그 한숨을 쉬게 됩니다. 그 한숨은 바른 기독교를 소망하는 모든 이들의 한숨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바른 기독교를 떠나는 것일까요? 홍순관님의 말대로 진리의 매력이 분명 있을진대 사람들은 왜 그것을 외면하고 등을 돌리는 것일까요?
그 중심에 힘의 문제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 경쟁의 세상 속으로 던져집니다. 어떤 성(性)으로 태어나느냐, 어떤 부모를 만나게 되느냐, 어떤 국가에 태어나느냐, 그리고 어떤 시대에 태어나느냐에 따라 그의 운명이 달라집니다. 개인의 노력에 의해 극복할 수 있는 부분이 남아있긴 하지만 한계가 있습니다.
주어진 모든 조건을 다 극복하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개인은 힘이라는 경쟁의 도구를 개발하고 사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개인이 노력해서 얻은 모든 결과는 자신이 행사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이 됩니다. 결국 세상에 태어난 모든 인간들은 힘을 추구하는 존재로 그 정체성이 형성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힘의 사용이란 정당한 것이며 불가피한 것이라는 가치관이 절대적인 것으로 개인의 중심에도 자리매김 하게 됩니다. 다른 이에게 뒤지는 부분이 있다면 열심히 노력해서 상대방을 따라잡고 나아가 그를 능가해야 합니다. 모든 문제의 해결은 힘을 강화하는데 집중됩니다.
개인의 힘으로 부족하다면 다른 이와 연합을 해서라도 상대방보다 더 큰 힘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사회에서 일어나는 끊임없는 이합집산은 바로 이 힘을 강화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이루어지고 또 그 성패가 갈라집니다.
사람들이 바른 기독교를 떠나는 이유는 이미 사회와 개인 모두에게 절대적인 도구이며 유일한 수단이기도한 이 힘을 버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힘을 포기한다는 것은 무방비 상태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두려운 일입니다. 더구나 힘이 있어도 세상은 항상 벅찬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무모한 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로또 복권(힘의 대명서로서의)을 습관적으로 사게 되는 것이 세상입니다. 어떻게 하든 힘을 소유하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하는 곳이 세상이라는 생각이 모두의 마음 깊이 새겨져 있습니다. 아무리 힘이 많아져도 불안의 요소는 남을 터인데 힘을 아예 포기하라는 기독교의 진리는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을 떠나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그것이 매력적으로 보일리 만무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바른 기독교는 사람들을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고 그것은 곧 약함과 무력(無力)으로의 초대라는 사실입니다. 다음 루터의 말은 약함과 무력의 이해에 도움을 줍니다.
"악마는 강력하고 교묘하게 그리스도의 세계를 공격한다. 폭군과 이단자와 거짓된 형제를 앞세워 진실한 그리스도인을 괴롭히고 온 세상을 선동해 공격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소수의 순전하고 모욕당하는 사람들을 데리고 악마와 악마의 왕국에 맞서신다. 세상의 눈에는 헛되고 어리석은 저항처럼 보이지만 그리스도는 결국 승리를 거두신다. 그리스도가 제자들을 세상에 보냈을 때 제자들이 흔히 겪은 것은 한 마리 불쌍한 양이 백 마리의 늑대를 상대해야 하는 불공평한 전쟁, 상황이었다. 제자들은 하나씩 살해당하고 죽어 갔다.
우리였다면 늑대와 싸우도록 사자를 보냈을 것이다. 여하튼 늑대보다 사납고 힘센 짐승을 보냈을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이렇게 잘못 생각하여 고통의 씨앗을 스스로 삼키고는 종들과 제자들을 학대하는 악마를 찾아간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우리의 미약하고 어리석은 생각과 행동에서도 그분의 한없이 고결한 지혜와 힘을 기꺼이 보여주신다. 오직 그리스도, 만군의 주만이 기적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늑대들 한 가운데서도 양을 지키며 직접 늑대들과 싸우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믿음이 인간의 지혜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힘에 있다는 것을 똑똑히 깨닫는다. 늑대들이 한 마리의 양을 삼키면 그리스도는 자신을 대신할 열 마리 이상의 양을 보내기 때문이다." -마틴 루터-
모두가 일등이 되기를 바라는 사회는 살벌한 전장터와 다름이 없습니다. 따라서 그 사회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기형적인 사회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거기에서는 남과의 대화나 공익 그리고 봉사 따위는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늘 약자의 희생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실상은 일 등이나 일 등에 근접한 사람들이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약자의 그 희생 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희생을 아예 하나님 나라의 기반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렇게 할 때만이 인류의 일치와 조화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사랑과 평화가 샘물처럼 흐르게 되는 새로운 사회, 약함이 존중받는 사회는 희생이 일상이 되는 곳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다른 이를 이기기 위한 힘이 아니라 자기를 죽이는 힘을 요구하셨습니다. 사실 그 힘(사랑)은 세상 어떤 힘보다 더욱 강한 초인적인 힘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고 하셨습니다.(요6:35) 그리고 당신의 살을 세상의 생명을 위해 내어주시고 사람들에게 그것을 먹으라고 하셨습니다.(요6:51)
당신의 존재를 자기를 죽이는 힘, 자기를 무력화시키는 힘으로 이해하셨기 때문입니다. 떡은 내주어 나뉘어 먹히고 씹혀 자기를 없애기 위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찬을 행하고 거기에 참여하는 이유는 우리도 주님처럼 우리의 살을 남에게 생명의 떡으로 내어주는 삶을 살기 위함입니다. 양은 늑대에게 먹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살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생명의 떡이 되어 늑대를 변화시킵니다. 잡아먹히는 것이 아니라 내어주어 먹힘이 될 때 모두가 함께 살아나는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원수까지도 사랑하라 하신 이유는 원수도 함께 살리기 원하시는 아버지의 자비를 알기 때문입니다.
성찬에 참여하며 그리스도처럼 되기를 원하며, 그리스도처럼 살기를 원하는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처럼 자신의 몸을 떡으로 내어놓는 사람입니다. 힘을 강화해 나가면서 자기를 보호하려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를 내어주기 위해 자기를 죽이는 힘을 구하는 사람입니다.
과연 이 진리의 매력에 빠지려면 얼마나 어리석어져야 할까요? 기독교를 바로 전한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날 것이라는 자크 엘룰의 말은 정말 맞는 말입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 만족과 자기 위안을 위해 기독교에 몸 담고 있는지 모릅니다.
더 많은 힘을 얻어 더 많이 누리고 더 많이 부리고 더 많이 인정받기 위해 얼마나 열심으로 신앙생활을 하는지 모릅니다. 그런 거짓되거나 함량미달의 자칭 그리스도인들이 용서하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고, 화해하지 못하고, 법정에까지 가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박이 터져라 싸우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바른 기독교를 아는 사람에게서 한숨이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런 한숨을 쉬는 사람 또한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 만군의 주만이 기적을 일으키신다는 것을, 한 마리 양이 삼켜지면 열 마리 양이 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약함이 존중받는 사회는 결코 허황된 꿈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고 다만 완성을 기다릴 뿐입니다. 그 사이에서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살을 남이 먹기 위한 떡으로 내어 놓아야 합니다. 약한 모습으로, 무력한 모습으로 말입니다.
생명수 샘물을 값없이 마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기 때문에(계21:1-7참조) 그곳에 다다르면 분명 자크 엘룰의 한숨마저도 사라질 것입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그 길이 협착하"다고(마7:14) 하신 이유를 마음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글/최태선 오직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는 목사
너무나 깊이 공감이 가는 글이다. 또한, 그의 문체와 적절한 그리스도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가져다주는 통찰은 무기력해진 내 신앙생활을 돌아보게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예수님께서 너무나 많이도 언급 하셨던 그 희생과 섬김과 오래참음과 사랑과 용서와 자비와 충성과 온유와 절제와 양선과..... 뭐 말해 무엇하겠나 입만 아프지. 어차피 말이 아닌 삶으로 살라고 하셨던 것이 아니었나를 생각해 보며, 과연 그리스도인으로써의 조화롭고 균형잡힌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계속 고민하게 된다.
심지어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저마다 다른 인생철학을 가지고 그 '균형'의 정의를 내려, 이미 균형잡힌 삶을 살고있다고 자부하는 이들도 있을 수 있으며, 자신이 정의한 그것을 좇아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도 있을테지만, 나는 그 정의 자체에 대하여 계속하여 회의하고 있으니, 정체되고 오히려 뒤쳐진듯한 느낌이 드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시각 장애인으로써 일반 고등학교에 영어 강사까지 하고있는 한 내 후배는, 이렇게 말했다.
"내 평생 소원은 하늘을 하루라도 보는 것이에요. 나는 내가 지금부터 몇십년간 번 돈 몇십억으로도 현대의학으로 그 소원, 다시말해 눈을 뜨는 것을 이룰 수 없어요. 당신들은 그 몇십억짜리 눈을 지불하고 받았나요? 그것을 한 번이라도 몇십억 이상의 가치만큼 감사해 본 적 있나요? "
그녀에게 있어 종일 더럽고 추하며 불쾌하고 음란한 것들만 바라보며 사는 사람들의 그 '눈'의 사용에 대한 생각은 과연 어떠할까? 내 몫까지 열심히 써 주고 있어 감사하다고 할까? .. 어떤 이에게는 평생의 소원이 될 수 있는 그 것을, 어떤 이에게는 그 눈을 사용하여 엄청난 일을 할 수도 있는 것을, 어떤이들은 너무도 쉽게 낭비하는 이런 불공평함은, 우리가 아무리 떼쓰며 목놓아 울어도 바뀌지 않는 현실이다. 그리고 그 현실에 익숙해진 가진자들은 이내 그 가치를 망각한다.
나는 막 세상을 알아가기 시작할 이십대에, 우리 인생에 있어 '무엇'을 하는가가 중요하기 보다는, '왜'하는가가 중요한 것은 모든 이들이 알것만 같은데, 정작 현실에서는 '왜'보다 '무엇'에만 미친듯이 열광하고 또 열광 하라는 주장을 당당히 펼치는, '무엇'을 하는가로만 사람을 평가하는 기이한 현상을 목격하고 충격에 빠졌었다. 마찬가지로 인생을 쾌락과 즐거움만으로 채우기 위한 노력도 좋겠다만은, 그 행복 이면에 발생하는 여러가지 상황과 문제들을 무조건 외면하는 비뚤어진 시각과 이기적인 생각은 우리가 가장 주의해야 할 부분이 아닐까.. 그렇기에 우리는 삶의 전반적인 영역에 대한 균형잡힌 시각을 갖추어야 하지 않을까? 결론은, '행복' 이전에 내가 추구하는 그 '행복'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분명히 인지해야 하지 않나 하는걸로 내가 결론을 내렸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그보다 더 나아가, 근본적인 삶과 죽음에 대한 고민, 이 세상의 모든 현상들과 일어나는 일들, 역사들, 나아가 인간 본연에 대한 이해까지도 나아가야 한다. 허나 그러한 깊은 사고는 사라진 지 오래된 것만 같다. 여전히 그 '무엇'을 좇아 시간과 열정을 다 쏟아붓는 사람들을 바라볼 때면, 나는 어제 죽던 그가 그토록 바라던 그 '오늘'을 낭비하는 듯한 이들의 일종의 폭력과도 같은 '낭비'로만 느껴져, 마치 그녀(시각장애인 친구)가 느낄법한 안타까움에 몸서리가 쳐진다. 허나 그 또한 나의 시선일 뿐, 나를 그렇게 바라보는 제3자가 없으리란 보장이 있는가?
서울에서 시골로 전학을 오게 된 한병태의 국민학교 시절 회상 이야기. 새로 전학온 학교에는 막강한 자신만의 철옹성을 구축한 독재자 급짱 '엄석대(홍경인)'가 있음을 마주하고, 그의 급짱(반장)이라는 권력남용과 뒤로 벌이는 여러가지 폭력과 비리들을 담임 선생님께 고발한다. 그러나 숨겨진 정보원에 의해 그 사실을 미리 알아내고 엄석대는 유유히 빠져나간다. 교묘한 엄석대의 함정에 하나 둘 빠진 한병태는, 결국 선생님께 거짓말장이, 문제아로 이미지가 전락하게 되고, 급기야 성적까지 떨어지며 점점 학교 내에서 입지를 잃어간다. 그 입지를 지키기 위해 그는 투쟁 대신 타협이라는 달콤한 유혹을 선택하고 권력의 맛을 보기 시작하는데..
* 감상 *
필자가 10살일 때, 그러니까 ..에..음..1992년이구나. 그 당시에 사회에 큰 영향을 주었던 영화. 홍경인(엄석대 역)과 고정일(한병태 역), 그리고 최민식, 그외의 여러 명품 배우들이 열연을 해 주어 더욱 빛이났던 영화. 이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스쳐가듯 몇번 들었으나, 왜 한번도 볼 생각을 하지 못했었는지 후회스러웠다. 이 좋은 걸 지금 본게 무척이나 아쉽지만, 한편으론 그 당시에 내가 보았다면 공감하지 못했을 이야기이기도 하고, 지금 내 나이이기 때문에 들지도 모르는 여러가지 생각들을 곱씹으며, 나는 지금 즐거움과 아쉬움, 그리고 슬픔에 취해있다.
<무언의 압박을 보여주는 우리 '체육부장'(일명 행동대장)의 카리스마>
이 영화는 그 당시의 열악한 제작환경과 수준에 비추어 보았을 때, 상당히 완성도가 높고 개연성과 연출이 뛰어나다. 또한 홍경인과 고정일(한병태)의 연기는 꽤나 수준급이다. 그 주변 조연인 친구들의 사소한 표정변화는 복선을 암시하는듯한 미묘한 긴장감을 조성했고,그들의 열연은 마치 할리우드의 영화배우들 못지 않게 보는 나를 웃음짓게도, 슬프게도 만들었다.
영화 가장 초반부에 주인공 '한병태'가 하는 독백,
"잘나가던 서울의 명문 '국민학교'를 뒤로하고 시골 촌구석으로 내려오게 되었다"...를 들으며. 참 우리 인간이라는 동물은, 예나 지금이나, 무언가 '급'을 정해두고 편가르기하며 너잘났네 나잘났네 하기를 정말로 좋아하는 족속이구나. 명문 국민학교라니. 풉. 우스워 나도모르게 웃고 말았지만, 이것이 여전히 현실이라는 사실이 문득 서글펐다. 그의 독백은 정말 '독백'이 아닌, 우리 모두의 독백은 아닐까. '급'이 다른 자녀의 학군을 향해 철새처럼 이동하는 우리네 이야기 아닌가 말이다.
서울에서 시골로 전학온 전학생 한병태. 크고 잘나가는 서울의 명문학교에서 곧장 1등을 도맡아 해왔으며, 꽤나 이성적이고 자신감에 차 있는 아이. 그러나 그가 내려온 학교는 단순히 촌구석의 찌질한 학교로 치부할 수준이 아닌 그이상의 것을 그에게 경험시켜 준다. 한마디로 작은 세상, 그 자체였고, 그 세상을 마주하며 점점 굴복하고 비굴하게 변해가는 무기력한 그의 모습은 우리들의 누구나 한번쯤 해 보았던 우리의 옛 비겁한 선택들을 상기시켜준다.
그 내면의 변화를 바라보는 것은, 마치 한편의 스포츠를 관람하듯 손에 땀을 쥐게 한다. 특히나 저 어리숙하고 젖살가득한 녀석이 덩치크고 시꺼먼 엄석대를 무서워하지 않고 마주하는 모습에선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와 같은 희열과 긴장감을 자아냈다.
그 촌구석 학교 하나가 어쩜 어른들의 세상과 이렇게도 다를 바가 없는지. 단지 '급짱(학급반장)' 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시작되는 갖가지 권력 남용, 정치, 조작, 정경유착, 비리, 폭력, 범죄, 술수, 모략, 끝없는 거짓과 그 거짓을 감추기 위한 더 큰 거짓..그 어리고 순수한 녀석들의 발칙한 행동들이 만들어내는 여러가지 이야기들은 나로하여금 잠시도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들었다. 또한 그 안에서도 굴복하지 않고 저항하는 한병태의 심리변화를 보다보면, 내심 나처럼 그를 응원하는 사람이 생길지도 모른다. 아! 영화를 보는 내내 전 직장의 임부장이 어찌나 떠오르던지.
틈만나면 골프만 쳐대는 사장위주로 돌아가는 가족같은 회사(필자는 '가'와 '족' 사이를 굉장히 떨어져서 읽는다), 그 주변에 달라붙어 콩꼬물만 받으면 나몰라라 쉬쉬해주는 기생충같은 이사들 부장들. 여직원들을 술자리에서 접대부처럼 끼고 노는 문화, 잘리지 않기 위해 눈치보는 여직원들. 일상적인 비리, 뒷담화로 가득한 쉬는시간, 거짓에 거짓 꼬리를 무는 영업사원들과 영업지원팀의 비리, 경리부만 따로 쓰는 법인카드,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다들 일하기 싫어 빈둥빈둥, 무책임한 작태들..등 등....... 토악질이 나 더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나역시 그곳을 바꾸지 못하고 빠져나왔다는 데에 일말의 죄책감을 느낀다. 쓰다보니, 나도 참 비겁한 '엄석대반의 학우'들과 다를바 없구나.
뭐, 그게 인간이니까 너무 많은 걸 기대하지마.. 하는 친구들의 충고를 들은적이 있다. 그래 나 역시, 모든 인간이 그렇게 살아가야 하는 것이고 바꿀 수 없는 현실이라면, 그냥 받아들이고 말겠어. 그런데, 그게 아니지 않은가. 우리는 그것이 옳지 않다고 배워왔으며, 실제로 이 진실과 자유라는 것이 얼마나 숭고한 가치이며, 그것을 위해 목숨을 바쳐 투쟁한 우리의 멋진 선조들이 많음을 우린 수없이 역사책을 통해 배우지 않았나. 왜! 우리는 그것을 위해 싸우지 않나. 왜 적당히 타협하고 왜 적당히로 끝나버리고 마는가.. 지금도 수많은 곳에서 '급짱'을 하며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엄석대'가 곳곳에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나부터라도 진실과 자유를 정말 소중히 생각하지 않으면 안되겠다 다짐하게 된다.
마지막 장례식 장면에서 나오는 대사, "엄석대 같은 녀석이 나와서 지금의 정치를 다 휘어잡아 줘야 할텐데" 하는 식의 독재주의 공산주의 찬양멘트따위를 듣노라니, 울화통이 터질 것 같았다. 그렇게 당해놓고도 그 녀석들은 여전히 한다는 소리가 똑같았다. 마치 일제강점기 때문에 경제가 발전했으니 잘된것이다 외치는 무뇌아들이 생각나면서 말이다.
<우리를 때리며 함께 아파하시던 스승님이 그립습니다.>
또한 인상깊었던 것은, 최민식(극중 선생님)이 어찌나 올곧으며 정의롭고 열정이 가득한 청년인지를 보며, 저러한 스승밑에서 자란 자들은 과연 어떠한 제자가 될 것인지 굉장히 궁금하기도, 부럽기도 했다. 고등학교 때 늘 꿀밤을 때리며 웃던, 그러나 막상 뒤에선 몰래 우리 어머니께 촌지를 요구하신 모 선생의 '매'와는 사뭇 다른 그 매. 그 매가 진심으로 그립다. 사람은 맞아야 한다 이런 몰상식한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은 자신을 스스로 다스리기 매우 힘이들기 때문에, 윗 사람이 아랫사람을 교훈과 훈계로 잘 양육하고, 아랫사람이 윗사람으로 하여금 '본'이 되도록 지켜보는 관계가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사실 이 영화는 4.19 혁명을 토대로 꾸며진 이야기이다. 또한 그 배경도 역시 그러하며, 원작자의 의도 또한 다분히 그럴 것이다. 허나, 우리의 삶에 있어 교과서적인 교훈들이 이 안에 참 많기에, 단지 정치적 수단으로써만 끝나지 않고 우리의 삶을 성찰하고 반성하게 하는 좋은 도구가 되었으면한다.
나는, 주저않고 이 영화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아울러, 우리들 마음속에 있는 일그러진 영웅들을 바로 세워, 우리의 진정한 영웅은, 달라붙는 수트를 입은 몸짱 슈퍼맨이나돈많은 재력가 아이언맨이나 배트맨이 아니라, 비뚤어지고 모순되어 이중성을 가진 엄석대가 아니라, 아무것도 없더라도 권력에 저항하고 '자유와 진실'을 위해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싸우는 수많은 용기있는 영혼을 가진 자들이 우리의 진정한 영웅임을 한번 더 되새기고 싶다.
한 마리의 여우가 포도밭 주위를 돌면서 어떻게 해서든지 그 속으로 숨어 들어가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울타리 때문에 도저히 안으로 기어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여우는 궁리 끝에 사흘을 굶어 몸을 마르게 한 뒤에 가까스로 울타리 틈 사이로 들어가는 데 성공했다.
포도밭 안으로 들어간 여우는 맛있는 포도를 실컷 따먹고 다시 포도밭에서 나오려고 했으나 배가 불러 그곳을 빠져나올 수 없었다.
그래서 여우는 할 수 없이 다시 사흘 동안 굶어 몸을 마르게 한 뒤에야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때 여우가 말했다.
"배가 고프기는 들어올 때나 나올 때나 매한가지군."
인생도 이와 같아서 사람은 누구나 빈손으로 왔다가 죽을 때 역시 빈손으로 가게 마련이다.
사람이 죽으면 이 세상에 가족과 명성과 선행 세가지를 남기는데, 선행 이외의 것은 과히 대단한 것이 못된다.
- 철학적이고 깊이있는 질문을 많이 던지시는 한 블로거님에게서 퍼온 글이다.
출처: http://blog.naver.com/kimih1661/60142630178
인생은 무엇일까.
과연 그러하다. 인생의 종착역에 가 보지 않았더라도, 도착한, 아니 지금도 가고있는 선배들을 바라보며 그곳에는 무엇이 있고, 그곳에 가져갈 것은 무엇이 있으며, 그곳에서 필요한 것을 우리는 '준비'한다는 식으로 이야기한다만, 결국 내가 입고있는 빤스한장 건지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갈 것을, 왜 그리도 악착같이 살았으며 남들을 이겨내기위해 부단히도 노력했던가.
"인생무상 인생 공수레 공수거 에헤라 디야~"
"먹고 취하고 즐기세~ 어차피 많이 생각해봐야 도진개진~",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이런 결론을 내리며 카르페디엠을 몸소실천하는 내 친구녀석들을 보면서도 나는 마음이 편치가 않다. 왜냐, 그들이 진정 자유하지 않기 때문이다. 단지 현실을 외면하고 도피처를 '술'과 '여자'라는 매개체로 정해두었을 뿐. 그들은 여전히 불안하다. 여전히 마음속 한켠이 답답하고 쓰리다.
인생이라는 그 길이 100이라면, 이제 겨우 31을 온 나로써는, 아직도 갈길이 창창하기에, 올바른 길을 한걸음 한걸음 늦더라도 차근차근 살아내고픈 심정이건만, 이놈의 친구란 놈들은 하나같이
"노인네같은 소리일랑 집어치우고 빨리 뛰기나 해" 라거나
"그리도 생각할 시간이 많아? 아직 안급하구만?" 라고 연신 비아냥댄다.
'젊었을 때는 돈을위해 건강을 바치고, 늙어서는 건강을 위해 돈을 바친다'는 우스갯 소리처럼. 내가 지금 무엇을 위해 살고, 왜 살아가며, 또 앞으로 어디로 달려가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생각할 시간따위 주지 않고 그저 열심히 달리기만 하라 채찍질하는 이 세상이 밉다. 달리지 않으면 낙오자 패자로 낙인이 찍혀버리고, 그 낙인을 받은 자들이 무슨 말을 해도 들을 생각조차 안하는 이 세상이 야속하다.
물론, 이도 불과 몇십년 전만 하더라도 상상도 못하리만치 팔자좋은 소리겠지. 6.25의 포탄과 총성속에, 괴성과 울부짖음속에 '살아남기' 급급한 자들이 바라보기에 내 모습은 '웃기고 자빠진' 놈의 궤변에 불과할테지.
허나, 내가 태어나기 이전의 역사를 바라보며, 우리는 무언가 배워야 하는게 아닌가. 역사가 되풀이 되는 것만큼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일이 있겠는가. 아주 조금이라도 나는 세상을 긍정적으롤 바꾸는 데 일조해야 하는것이 아닐까.
7 환난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에
8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9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 불편한 진실이며, 특별히 믿지 않는 이들에게 마주하기 싫은 이야기인, 영원한 멸망의 형벌.. 그것에 대하여 우리는 알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로 그것을 외치면서 받는 고난과 환난은 원하지 않기에 전하지 않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특별히 내 뜨뜨미지근한 모습에 대하여..
11 이러므로 우리도 항상 너희를 위하여 기도함은 우리 하나님이 너희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 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고
- 그렇기에, 부르심(calling)을 받은 우리로써는, 마땅히 그 부르심에 대한 책임을 물으실 것이며, 그것이 나에겐 어떠한 의미이고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지표가 된다.
- 선을 기뻐하고,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는 것 또한. 내가 지향해야 할 내 미래의 모습이다.
Chapter 2.
11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12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
- 2장 전반에 걸쳐 나오는 거짓선지자, 미혹케 하는 자, 배도하며 불법하는 멸망의 아들에 대한 예언.. 그리고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
15 이러므로 형제들아 굳게 서서 말로나 우리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유전을 지키라
- (NIV참조) stand firm, hold to the teaching they passed on to us. strengthen ourself in every good deed and word.
- 성경의 가르침, 즉 선한 일과 말에 대한 우리의 열정을 더욱 굳건히, 강하게 하고 더욱 담대히 서는 것..
Chapter 3.
2 또한 우리를 무리하고 악한 사람들에게서 건지옵소서 하라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님이라
5 주께서 너희 마음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 믿음은 모든사람의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 요즈음 나타나는 여러가지 현상들을 생각나게 한다. '기독교 신자'지만 굿을 벌려 미래를 점쳐보는 사람들, 교회는 나가지않으나 여전히 크리스천이라고 이야기하는 '가나안'이라 불리는 사람들(거꾸로 읽으면 안나가 이기 때문). '신앙'이 삶의 첫 번째 우선순위인 것은 아무런 득이 되지 못하고 되려 이단에게 공격받는 리스트의 일순위에 오르는 정도의 영향밖에 없는, '실용적'이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점차 믿음을 치부하고 져버리는 사람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나,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이 복음이, 이 말씀이, 우리의 삶에 원하는 최종적인 목적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속하여 그 은혜안에서 자유로워 지는 것이 아닌가. 내 삶을 돌아보고 다시한번 바로세우기 원한다.
6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규모 없이 행하고 우리에게 받은 유전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7 어떻게 우리를 본받아야 할 것을 너희가 스스로 아나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규모 없이 행하지 아니하며
8 누구에게서든지 양식을 값없이 먹지 않고 오직 수고하고 애써 주야로 일함은 너희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려 함이니
9 우리에게 권리가 없는 것이 아니요 오직 스스로 너희에게 본을 주어 우리를 본받게 하려 함이니라
10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11 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규모 없이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만 만드는 자들이 있다 하니
12 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종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하노라
- 규모없이(idle: 한가하게, 시간이 비어있는) 행하는 자들이 되지 말라
- 양식을 값없이 먹지 말고 오직 수고하고 애써 주야(밤낮)로 일하라 :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않게(do not be dependent to anybody)
13 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치 말라
14 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 말을 순종치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저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
15 그러나 원수와 같이 생각지 말고 형제같이 권하라
- 선을 행하다가 낙심치 말라 하며, 순종치 않는 자들을 '원수'로 대하지 말고 오직 '형제'로 대하며 권하라고 권고한다. 선을 행하는 것은, 특별히 아무런 댓가를 바라지 않는 선행일수록, 그 내면 깊은곳을 점검해 보아야 한다. 정말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하는 것인지. 나의 선행의 동기는 무엇인지. 우리들의 선행의 동기는 그리스도께 받은 사랑을 되돌려(hand back)주는 것이어야만 낙심치 않을 것이다. 내 마음 속의 모든 행동의 동기를 다시한번 짚어본다.
* 데살로니가후서 3장 내용의 전체적 문맥상 흐름을 보면, 단순히 선을 추구하라 수준이 아닌, 적극적으로 선행을 도모(planning)하는 것을 강조하고, 규모없이 행하지 않는 것(do not idle)을 통해 열정적이고 자기주도적인 삶을 강조하고 있으며, 그럼(주야로 일하며 선행하여 힘들고 피곤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비판하거나 원망치 않고 나눠주며 선을 행하며 형제로 대하는 삶, 다시말해 관계에 있어서 그 어떠한 인간들의 논리를 뛰어넘어, 초월하고 초연한 마음가짐을 갖기를 원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 않다면 이것을 과연 할 수 있겠는가?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이 아닌가?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상식보다 훨씬 위대하신 분이다! 우리의 얕은 지식으로 어찌 피조물이 조물주의 뜻을 헤아릴 수 있을까!)
비록 내겐 언니가 아니라 하더라도, 그리고 그 '언니'로 불리우게 될 때의 포지션이 가져다 주는 포스는 참으로 '형'에게서는 느껴보지 못할 만큼의 위력적이고 카리스마있는 모습인지를 새삼 경험하게 된 책이었다.
책장에 있는 책을 우연히 집어들어 2시간만에 후딱 보게된 책.
자기계발서를 왜이리 오래 정독했나 묻는 이도 있을지 모르겠으나, 이 책은 그럴만 했다고 말하고 싶다.
이 책에는 흔하디 흔한 '자기계발'서와는 다른, 무언가 굉장히 삶의 지혜와 통찰이 녹아있다는 생각이 들만큼, 심지어 노트를 들고 적어대기 시작할 만큼의, 저자의 이시대 청년들을 향한 안타까움과 열정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읽는 내내, 삶의 의욕을 잃거나 좌절하여 방황하고있는 친구들 후배들에게 권해주면 좋을것 같다고 생각했다.
* 꿈 (통찰에 의한 꿈)
우리는 꿈을 꾸지만, 실제로 그것은 그냥 (dream)에 불과하다.
하지만 꿈을 이루는 사람들은, '통찰'에 의한 꿈(vision)을 삶으로 꾼다.
구체적인 세부계획과 많은 Data를 기반으로 꿈은 시작할 수 있다!
창업이든, 취업이든, 또다른 어떠한 방향이든, 먼저 시작하여 Data를 쌓아라!
* 시간 (1+1기법)
시간이라는 것은 인간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진 '달란트'다.
이것이 어릴 적에는 시간당 1000원짜리 일지도 모르고, 5000원 짜리일지도 모르나,
그 시간을 집중하고 투자하고 관리하면, 어느새인가 그 시간이 500만원짜리로 될 지도 모르는 일이다.
김미경 강사는 '하루경영'을 하며 1+1 기법(화장실에서도 책을 보는 것, TV볼 때에도 포스트잇을 들고 episode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된 사람처럼.. 무슨 일을 하면서도 시간을 아끼기 위해 다른 일을 함께 하는 것)에서 이제는 1+3까지 발전하게 되었다고 자신을 소개한다.
어차피 인간은 '기초역량'끼리 뜬다!! 쫄것없다!
* to the Great
위대한 사람은 '내적동기'가 높다.
ex>미켈란젤로는 천지창조를 그릴 때 아주 보잘것 없는 부분을 몇일간을 그리는 자신에게 어리석다 말하며 누가 그걸 알아주겠냐 묻는 친구에게
'내가 알지' 라 말했다.
'내'가 만족하는 모습은 지양해야 할 태도이다. 나의 '내적동기'가 높을 때, 비로소 one step 더 Great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 생각의 차이. 발상의 전환 (집안일)
남편이 돈을 못벌어온다? : 이혼사유(x), 여자가 돈 벌 사유(o)
여자는 가정일과 육아를 모두 담당해야한다? 남자가 집안일을 '도와'준다? No! 협력하는 것.
일은 같이 하지만, 대부분의 남자들은 아침밥은 여자에게 얻어먹고 싶다? = 같이해라!
(결혼전에 내가 알게되어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버지가 늘 그러셨듯, 또한 어머니께서 그러셨듯, 그것이 몸에 자연스레 베어 부엌일은 다 여자의 전유물이라 생각하는 내 모습을 보게 되었다. 사고의 전환으로 가정을 '협력'해서 꾸려나가야 한다. 나부터 마음을 고쳐먹자)
아이들의 Manager가 되어 밥, 숙제, 학원 스케줄..일일히 다 챙겨주지 마라! 아이들의 Roll Model이 되어라! 스스로 할 수 있도록 도와주자!
'결혼'은 같이 5천만원씩 합자해서 세운 회사다! 자본금이 적을 수록 직원 모두 더 열심히 일한다!!!
* 회사는 용돈을 주는 학교다!
회사는 학교다! 들어올때는 다 같지만, 나갈때는 완전히 다르다!! '학습'하고 더 배울 것이 없을 때까지 일하라!
그녀가 자주 언급하는 '최이사'는 의리있고, 굉장히 헌신적, 열정적이며, 또 부지런하기까지 하다.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 밥 한두끼 사는 것보다 그들의 필요를 보고 멋진 '선물'을 하라!
CEO가 나에게 존경을 표할 만큼, 또 내가 나가는 것을 붙잡을 만한 사람이 되어라!
유토피아를 꿈꾸는 우리. 생각할 시간을 갖길 좋아하는 우리…
- 그러나, 지하철에서 시간 쪼개서 책 읽지, 여름휴가 내서 해변가에서 책 20권 읽고 떠나는 사람이 되지 말아라!
1만시간의 법칙. Prime Time(매일3시간 x 10년)을 한 곳에 집중하면, 그 분야의 최고가 될 수 있다.
- 하지만, Sub Time(남은21시간 x 10년) 역시, 그 Prime Time을 위해 준비되어야만 한다.
* Enjoying Life
주말에는 전혀 다른 자신을 찾아 떠나라! (가죽자켓을 입고 모터사이클을 즐겨보라!)
놀 때도, 연애도, 무엇이든 열정적으로 하지 않는 사람이 일을 잘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나에게 투자하라 : 지식을 넓히는 것(인간관계, 전문성, 트렌드, 시사, 문화, 사회)에 주저하지 마라!
- 더이상 배울 필요가 없어보일 만큼 높은 위치의 사람들이 오히려 더 끊임없이 배우려 매일 새벽 세미나를 듣는다!
'자신이 절망에 빠져 있을 때엔 새벽 4시30분에 일어나 보라' 고 말하던 그녀는, 정말 내공이 장난이 아니다. 처음엔 말뿐인 것만 같은 자기계발강사들의 뻔지르르한 모습에 신물이 났었으나, 본받을만한 점이 너무나 많다!!!
천사와 같은 그녀가 악마와 같이 보일 수도 있게 만드는 의심이라는 판도라의 상자에 관한 이야기..치밀함과 잔인함의 꿀을 바른 세치 혀의 농간으로 시작된, 인간의 무지함과 편협함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그 농간에 너무나 쉽게 속아가는, 마치 봉사와 같은 한 남자의 비뚤어진 사랑은 흡사 동전과 같이 아름다운 사랑의 잘못된 전개가 가져오는 비극의 비참함이 어디까지인지 헤아리게 만든다.
이 모든 비극의 원흉, 음모의 시작인 이아고. 그의 동기는 누구라도 사실 쉽게 이해하기 힘들만큼 비뚤어져 있는데, 나는 그것을 '상대적 박탈감'에 의한 것이 아닐까 추측해보았다. 권력과 명예, 덕망이 높고 인품이 좋으며 충신인 오셀로.. 그의 성공과 칭송도 모자라 백향목과 같이 향기롭고 순결한 어린양과 같이 아름다우며 정조있는 부인을 얻는 행운까지.
그러나 그 검은 양반 오셀로의 출세와 성공가도가 영 거슬렸던 그는, 비록 자신이 아내를 두고있으며, 부족함 없이 살아가는 삶임에도 불구하고, 저주의 서곡을 쓰기 시작한다.
우리의 눈에는 행운이요 축복인 것들이 유지되고 지속되기까지에는 얼마나 많은 노력과 희생이 필요한지. 축복이 축복으로써 완전하기 위해서는, 아무 눈에도 띄지 않게 숨겨둔 축복이거나, 남들 눈에 '축복'으로 보이지 않는 축복 다시말해 우리 내면의 만족감과 행복함의 정도가 상대적으로 낮다 하더라도 타인의 수준에 연연치 않고 즐기는 것(자족)이 그 축복을 never ending story로 만드는 비결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상대적 박탈감. 그 시대나, 지금의 시대나. 변함없는 이 '경쟁구도'와 '상대평가'.
우리는 유난히 더 상대적인 박탈감이 만연한 시대에 살지 않나.. 매스미디어와 인터넷, 스마트폰과 같은 각종 통신수단의 발달은, 우리가 더 '소통'하게 하는 반면, 더욱 타인의 삶과 비교를 통한 자기의 위치를 파악하는 심리를 습관화되도록 만들었다. 스타강사 김미경이 자신의 고향에서 그랜져를 타던 마을 이장님이 가장 부자이며 멋져보였다던 어릴 적, 그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가 부러움의 대상이었으나, 막상 서울을 상경한 뒤에 우물안 개구리였음을 느낀 김미경씨는, 이장님의 재정상태는 그다지 높은 수준이 아니었음을 깨닫고, 그에 대한 이미지가 온통 사라졌다고 했었던 이야기를 통해 우리들의 삶은 여전히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느낄 수있다.
끝없는 경쟁의 굴레에서 뛰고있는 햄스터와 우리는, 어쩌면 같은 처지가 아닐까?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것이 없나니.." 라는 성경구절이 문득 생각난다.
극중의 아름다운 여인 '데스데모나'..
이 작품속 그녀의 빼어난 자태와 기품, 고결한 성품에 대한 묘사는, 시대와 국경을 넘어 셰익스피어의 문학을 즐기던 남성들에게 얼마나 그녀를 그리게 했을런지. 내가 직접 만나지 못하였더라도 사랑에 빠져버릴만큼 아름다우며 즐겁다.
오해와 불신이라는 안경을 써 버린 오셀로가, 그녀를 때리고 욕하며 저주할 때에도 그녀가 보여주는 순수하고 이타적인 성품은, 어찌나 황홀한지. 게다가 자신의 이러한 상황을 만들어 버리도록 계략을 꾸민 이아고와 같은 자들을 신께 오히려 용서해 달라는 기도를 올리는 그녀.
과연 이러한 여자가 세상에 존재할까? 이토록 진실되고 순결한 자가..
오셀로를 보지 말았으면 좋았을 것을, 내 눈이 높아지는 소리가 들린다.. 하 하.
사람이란 얼마나 간사하며 영악해 질 수 있는지. 때론 어찌나 연약하고 쉽게 꺾이고 부러지는지. 말이란 것에는 얼마나 큰 힘이 있는지, 또 정직하고 순결을 지키는 것에 대하여 얼마나 많은 이들이 열망하고 긍정하면서도 실제론 그리 살지 않는지.
문득 '선'과 '악'의 싸움은 애초부터 선이 승리할 수 없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도 들 만큼, 참으로 순식간에 '악한' 이아고의 꾀임으로 인해 나락으로 떨어지는 '선한' 오셀로의 모습은,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는 말씀구절과, '깨어있으라'는 말씀구절이 계속해서 생각나게 만든다.
오셀로, 비록 극의 내용도 하나 모른 채 연극으로 처음 보고 관심을 가진 극이었으나,
아, 왜이리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게 만드는 극이냐! 아 왜이리 데스데모니와 같은 여인을 꿈꾸게 하는 극이냐!
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하는 이들과, 요란케 하여 분별력을 잃게하는 것에 대한 경계. 나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올바르게 알고 있는가?
12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받아 그리스도의 종이 된 자신을 피력함. 그와 같은 확신을 단지 '믿음' 하나만으로 가질 수 있을까? 가능할까..?
- 바울의 유대교에 열심이었던 시절에 대한 회의와, 그로 인해 핍박하던 자신이 복음을 전하는 상황으로 인하여 오히려 영광을 돌리게 된 자신의 모습을 주장.
Chapter 2.
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 2장 전체의 주제가 내포되어 있다. 유대인과 이방인을 분리하여 생각하던 이분법적 사고의 그 당시 사람들은, 우선은 그리할 수 밖에 없는 인습과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으며, 또한 사람의 특성이 자고하기 원하고 당짓기 원하며 편가르기 원하는 특성인지라, 그러한 특성이 쌓이고 쌓여 마침내 그 시대에 도드라지게 되었다. 어쩌면 예수님께서 그 때에 오시지 않았다면, 그것이 굉장히 삐뚤어진 곳으로 치달아 바벨탑과 같은 일들이 한번이 아니라 몇십 몇백번이라도 일어나지않았을까? 역사를 통해 바라본 인간의 모습이라면 충분히 가능하다. 각 나라와 시대별로 얼마나 많은 이들이 '통치'하기 원했으며 모두를 '군림'하기 원했고, '다스리'기 원했는가. 하지만 애초에 사람이 누군가를 다스리고 '통치'하며 심지어 '책임'을 진다는 것이 가당한가. 하나님의 권력에 도전하는 것의 결과는, 역사가 늘 증명하듯, 패망이다. 그렇기에, dependent 가 필요하다. 그저 그분의 은혜에 감사하며 그분을 바라며 사랑하며 사는 것..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 새롭게 다가오는 말씀이다. 이제 그가 사는 이유는 '율법'이 아닌 '믿음'으로 사는 것이라 한다. 왜 이 말씀을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였었는가..
Chapter 3.
11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22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주기 위해, 이 모든 것들을 폐하셨다. '믿음'이 온 이후로는 우리를 가르치던 몽학선생(율법)아래 있지 않다.
Chapter 4.
19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 for being like Jesus
21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22 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23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24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25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 노릇 하고
26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27 기록된 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28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29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30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종과 그 아들을 내어쫓으라 계집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31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계집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니라
- 아브라함의 두 아들 (계집종 vs 자유하는 여자)
다시말해 하가(시내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와 예루살렘(자유자)의 자녀가 있다.
믿음이 있는 우리는, 이삭과 같은 '약속'의 자녀임을 미리 비유하신 것이다..
그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하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동일하지만, 하나님은 자유자의 자녀를 원하신다. 나는 자유자의 자녀로써 삶을 계속해 살아내야 한다.
Chapter 5.
1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 이미 그리스도께서 우릴 위해 자유를 주셨음에도, 여전히 율법적인 부분에 메여 살기 원하는 죄된 우리들. 우리의 무지함으로 '은혜'를 깨닫지 못하는 우리의 삶. 지난 나의 삶..
아. 얼마나 은혜인가. 하나님의 은혜. 한량없는.. 주의 은혜. ㅠㅠㅠㅠㅠ
3.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거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 Jesus Christ. He is the only one who should be obey the whole 'Rule'
- He is the only way to obey everything...
5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 our Hope : 오직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우리의 믿음만이 그를 영광스럽게 할 수 있다..
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 별표 백개!!!!!!!!!!!!!!!!!!!!!!!!!!!!!!!!!!!!!!!!!!!!!!!!!!!!!!!!!!!!!!!!!!!!!!!! -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다. 이 은혜로 말미암은 자유의 기회를 가지고, 육체의 정욕을 좇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자...그저 그분의 사랑에 매여..그분의 사랑에 빚 그 빚 하나만 가지고 살아가자. 그저 용서하자. 그저 사랑하자. 그저 베풀자. 그저 나누자.
[육체 vs 성령] 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 Q: 육체를 좇길 원하는 내 본성, 내 죄악된 모습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 A: 성령을 좇아라!
<개역한글판>
19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 음행 : 음탕하고 난잡한 짓
- 더러운 것 : 때나 찌거기 따위가 묻어 지저분하다
- 호색 : 여자와 성적관계를 맺는 것을 지나치게 좋아함.
- 우상숭배 : 신 외의 사람이나 물체를 신앙의 대상으로 숭배함
- 술수 :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일을 꾸미는 교묘한 생각이나 방법
- 원수를 맺는 것 : (자기나 집에 해를 입혀 원한이 맺히게 된 사람이나 집단)을 맺음..
- 분쟁 : 서로 시끄럽게 다툼
- 시기 : 남이 잘되는 것을 샘을 내고 미워함
- 분냄 : 억울하고 원통하여 분한 마음
- 당 짓는 것 : (당쟁:권력을 잡기 위해 당파나 정당 등으로 나누어 싸움을 벌임.)
- 분리함 : 서로 나뉘어 떨어지게 하다
- 이단 : 정통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교의나 교파를 적대함. 끝이 다름.
- 투기 : 기회를 틈타 큰 이익을 얻으려 함. 내던져버림,
- 술취함 : 술을 마셔 정신을 차리지 못함.
- 방탕함 : 주색잡기에 빠져 행실이 좋지 못함. 술,성적쾌락, 노름 등에 과도하게 빠져 바르게 살지 못함.
- 사랑 : 어떤 상대를 애틋하게 그리워하고 열렬히 좋아하는 마음. 다른사람을 아끼고 위하며 소중히 여기는 마음.
이불속에서 나오고 싶지 않았었으나 이내 "그게 뭐!! 뭐 어때서!" 하는 반항심과 함께 오늘아침 이불을 박차고 일어났다.
약속하나 없는 석탄일 아침
아침부터 '넘의 살'을 먹자는 엄마의 표현이 마냥 귀여워 한참을 웃고나서
함께 삼겹살을 구워먹고 느긋하게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떨다가 문득
'연애' 에 대한 많은 강사들의 화려한 입담이 참 재미지다는 이야기를 꺼내며 몇 동영상을 깔깔대며 보기 시작했다.
나에게는 인터넷이라는 놈이 처음에는 '지도'찾는 것으로 시작했다가, '사회'면과 '정치'면, 그리고 '연예'면까지를 다 보고나서끝나버리는 것 처럼 정처없이 방황하는 일이 다반사인데, 내 정돈되지 않은 내면세계와 닮아있는 것 같아, 그 공간이 그런 줄 알면서도 매번 열고나서 한참을 보낸 후에 후회를 하고 닫는다.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연애'강의를 보다가 김미경 강사의 '부자스토리'라는 강의까지 보고 앉아있게 되었다. 그 스토리 중 한 대목을 보며 이런저런 생각이 나 끄적여본다.
한 집안과 다른 집안의, 100년 넘게 '차이'난다는 그녀의 한이 서린듯한 말.
누구는 1980년대에 이미 '미국'유학을 다녀와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석좌교수를 하고, 누구는 '돼지'우리를 돌보며 근근히 살아가고 있다며 자신의 집안이 걸어온 길에 대한 후회와 반성, 그리고 자신은 절대 그렇게 살지 않겠다 다짐 또 다짐하는 그 모습, 그리고 실제로 악바리같이 살아온 그녀의 삶..
나는 여태 그 '차이' 라는 개념, 다시말해 그 '성공' 에 대한 많은 이들의 가치관을, 성경적인 사고로 생각한다는 전제 하에, 굉장히 세속적이고 무의미한 일이라고 생각해 왔었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성경적인 사고'라는 것에 대해 설명한다면, 우리는 많은 것을 '소유'하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은연중에 '비교'하며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는 인간들이기에, 충분히 '행복'하게끔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들(자연,환경,가족,건강,시간,양식,에너지 등등)을 감사하지 못하게 하는 '사탄'의 수단이며 계략이라는 것이다. 그 사탄의 수단이라는 것은 대한민국 땅에서 유난히 잘 먹혀들고 있는데, 예로 들자면 '좋은 학교'와 '좋은 직장', '좋은 차, 집, 옷, 좋은 배우자, 멋진 외모, 좋은 컴퓨터..' 등과 같은 우리들의 끝 없는 욕심과 욕망을 구체화 시키고 현실화 시켜낸 장난감들을 계속 만들어내 우리가 '감사'하지 않고 '불평'하며 살게하고 또한 진짜 '중요한' 것이 아닌 부가적인 것을 위해 우리의 시간과 물질과 노력을 다 쏟아붓도록 한다.. 라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무언가 필요해서 사는 것이 아니고, 빈곤해서 가난한 것이 아닌 상대적빈곤과 상대적 박탈감이 우리 인생을 좌지우지 하는 일이 다반사인 이 현실에 대한 해결책이랄까. 물론 해결책이 아닌 나만의 정신승리일 수도 있겠지.)
그렇기에, 남들이 바라보기엔 우리 집안이 100년 내내 곰국만 끓여오는 별볼일 없는, 변화나 어떠한 멋진 '성공'스토리가 없어도 '하나님 한분'만으로 만족해왔으며 '정직'과 '성실'이라는 큰 가치를 지켜왔다..라는 그런 이야기가 더 자랑스럽고, 더 큰 가치를 위해 희생하는 스토리라 생각했으며 나 또한 그렇게 살리라 마음먹었었다.
하지만!!!!! 문득, 오늘 오전 그런생각이 든다. 내가 문득 '성공'을 무조건적으로 '지양'해 왔던 것은 아닌가? 하는 질문과 함께, 그들(성공한 사람들)의 삶은, 내가 생각해 왔던 것 만큼 그렇게 치부할 수준의 것이 아니었다고. 그들은 정말 열심히 살았고, 그들의 삶에서 많은 것들을 희생하면서 까지 그 것을 위해 달려왔으며 굉장한 노력이 수반되어야 한다고.
그러한 생각이 들고나니, 끊임없는 질문들이 내게 덤벼들기 시작한다. 물론 그들의 '동기'는 나 역시 반박하고 싶다. '성공'지향, '부'지향, 이것은 여전히 내가 따르고 싶지 않은 세속적 가치임엔 분명하다. 허나, 그들의 그 열정과 겸손함, 그리고 그 절제(self-control이라 NIV 성경에는 묘사되어 있듯)하는 극기의 정신은 무조건적 성공을 지양해 오며 '교만함'과 '오만함'에 빠져있던 내 모습보다 훨씬 더 멋지다는 것..그리고, 그 성공을 '지양'해 오던 나의 가치관도, 결국 그들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으며, 무의식적으로 어느정도는 그들의 가치를 좇으며 살고 있다는 것.
시대적이고 지역적인 어떠한 모순들에 대한 '통찰'을 너무 저급하지 않고 또한 침착하게 가리키는 듯한 그의 비꼼의 미학을 그는 당시의 신문사들에 꽤나 많이 송고하였었으며, 다양한 집필활동을 통한 두터운 애독자층을 보유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현학적이며, 사회적 현상에 대한 풍자라거나, 음식에 대한 강한 애착과 나열, 풍부한 상상력을 가진 작가라는 이유만으로도 그 당시에, 아니 지금까지도 꽤나 사랑받는 작가가 될 법함에는 이견이 없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책은 내가 원하던 류의 책은 아니었나보다.
일전에 preview에 써 두었던 어떠한 나의 기대감이 너무나 컸던 탓일까. 이 책을 중간 즈음 읽다가, 집어던지고 싶은 내 마음을 가까스로 억누르고, 애초에 멋져보이던 그가 우스꽝스러운 머리를 하고 나를 쳐다보는 그 표지를 이렇게 몇일만에 다른 감정으로 다시 바라보게 된 나의 밑도끝도없는 심리 변화가 우스워, 유쾌하게 살진 못한다 하더라도 유쾌한 마음가짐으로 리뷰는 마무리 해야겠다 싶다.
고급스러움과 특권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듯, 또한 다른 이들을 질타하며 지식층을 대변하는 듯 보여지는 그의 모습과, 마치 자신의 유쾌함과 뛰어난 통찰을 자신 스스로도 이미 충분히 알고 있으며 그것이 자랑스러운 그의 자신감이, 내겐 되려 거부감으로 다가왔다. (아무래도 난 마이너 성향이 강한듯..ㅋ)
본명은 "새뮤얼 랭혼 클레멘스".1835년 생인 그는 남북전쟁을 참전한 적이 있으며, 가난속에서 살았고, 인쇄소에서 일을 하며 지내다가 언론일에 관심을 갖게 되고 급기야 작가로써의 삶을 살아왔던 남자다.
'고 장영희' 작가를 본 이후, 삶이 순탄치만은 않았음에도 자신 내면의 기쁨을 잃지 않은 사람을 오랜만에 보게된것 같아 굉장히 반가웠다.
나는 [전쟁을 위한 기도]를 통해 처음 관심을 갖게되었는데,
마크트웨인은 일찍이 기독 신앙이 있었다. 또한 그 신앙을 바탕으로 '전도'를 하는 것이 그의 사명과 열정이라 여겼었으나, 이내 자신의 삶의 방향을 고쳐먹고, 글로써 많은 이들에게 여러 사색과 생각의 폭을 넓힐 즐거운 상상력을 발산하기로 마음먹은 것 같다.
한 때 개그맨이 꿈일 만치 유쾌하고 남들에게 웃음을 주는 것을 좋아하는 내 취향과, 신앙에 대한 끊임없는 의문들에 대해 고민과 나름대로의 해석을 반복하며, 심지어 내 믿음이 정말 막연하고 아주 작은 것임을 깨달을 때마다 나락까지 오르락 내리락 하는 우스꽝스러운 상황을 어느새 습관과 같이 즐기게 된 내 모습이
묘하게 닮아 보이는건 나만의 착각인가?
몇십년만에 헤어졌던 형을 만난 느낌처럼, 난 지금 흥분했나보다.
난 사실, 아직 이 책을 읽지 않았다. 단지 이 작가의 성격과 특성들이 굉장히 괴짜 스럽고, 때론 발칙하리만치 솔직하며,
지나치도록 어떠한 상황에 대하여 웃어넘기는 여유를 지녔다고 할까. 하는 그 모습들에 매료되어 이 책을 골랐을 뿐.
나도 곧 이 형아처럼 유쾌하게 이 세상을 웃어넘기는 여유를 가지며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만 풍성하다.
괴짜들이 좋다.
많은 고민을 하는 괴짜들.
무슨대학, 무슨자격증, 무슨점수, 무슨 무슨 무슨
이시대를 살아가는 피상적이고 영혼없는 자들의 열심이 답답하다.
그러나, 나 역시 그 피상적이고 숨이턱턱막힐것만 같은 삶과 크게 다르지 않게 순응하며 산다는게 포인트..
요즈음의 시대는 돈으로 안되는게 없다. 웃음도, 울음도, 호응도, 동의도 모두 다 살 수 있다.
돈을 주고 산 웃음소리와 박수소리, 리액션들을 열심히 해 내는 방청객들과 같이,
매주 일요일마다 의미없는 말들을 내뱉는 또 다른 사람들이 있다.
'서로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아멘!!!!"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살기 위해 목숨을 걸고 열심을 다해야 합니다'
"아멘!!!!!!!"
그들은 '교회'의 성도들이며,
늘상 반복되는 연례행사와 같이, 매일 먹고 자고 싸고 하는 일이 반복되어 더이상 아무런 느낌도 목적도 깊은 의미도 없이 그냥..중언부언. 그렇게. '아멘'을 외친다.
이뿐인가. 목회자들은 한술 더 떠서 아멘을 구걸한다.
"여러분 대답좀 해주세요! 제가 하는 말에 동의하시면 아멘 좀 해 주세요! 아멘좀 하세요!"
아멘을 구걸하면 그것이 아멘인가? 아멘은 무엇인가?
여러 뜻이 있는데, 동사로는 ‘확실하다’, 명사로는 ‘진리’, 부사로는 ‘참으로’, 끝맺는 말로는 ‘확실히 그렇게 되어지이다’ ‘그렇게 해주십시오’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원래는 유대인들이 제례의식 때 사용하던 말이었는데, 그리스도교의 예배와 전례(典禮)에 그대로 수용되었다. 신약성서에 포함된 사도들의 편지를 보면 이미 성부 ·성자 ·성신에 대한 송영(頌詠) 다음에 끝맺는 말로 사용하고 있다. 로마식 전례를 보면(고린I 14:16), 기도 ·찬가 ·축하식이 끝난 다음에, 또는 성사(聖事)의 집전에서 답사의 끝맺는 말로 사용하고 있다. 다만, 세례 용어 다음에는 쓰지 않는다. 프로테스탄트에서는 예배 때에 기도 ·찬송 ·신경(信經)암송이 끝난 마지막에 이 말을 쓰며, 목사가 시편이나 성구를 읽은 다음에도 사용한다. 설교나 기도 시간에 동참한 자들이 그 설교나 기도말에 동감이라는 뜻으로도 쓴다. <출처 : 네이버 백과사전>